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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k_pop #국내힙합 #k_hiphop

에세이 Essay

조카

Gunn the Seeker 2024. 10. 3. 22:08

추석 연휴 동안 입원을 하셨던 형수님이 퇴원을 했다. 형수님 뱃속에 조카가 예정일보다 2달이나 빨리 (그것도 명절 연휴에)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해서 그녀의 입원은 우리 가족들의 관심과 우려를 독차지했다. 퇴직을 하고 본가에서 쉬고 있던 나에게 형은 ’지금 너가 여유가 있으니 운전해서 형수를 집으로 데려다 주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나는 형수님을 신혼집으로 모시게 되었다. 퇴원을 도와주신 형의 장모님(사장어른)을 포함해서. 사장어른과의 만남은 형의 결혼식 때 뵌 것이 전부였다. 형수님은 그나마 괜찮은데, 사장어른을 모시는 것은 진짜 불편할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계모임에 참석하신 어머니의 차를 빌렸다.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는 순간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혼자 운전하는 것이 걱정된다고 어머니가 동행하실 것이라 하셨다. 어머니는 아마 나의 운전실력보다 만삭의 며느리를 더 걱정하신 것 같다. 분명히 계모임에 가셔서 커피를 한잔하고 오겠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모임이 빨리 끝났을 리가 없다. 결국 만삭의 형수님은 시동생이 운전하는 시어머니의 차에 시어머니, 친정어머니와 함께 탑승한 셈이 되었다. 불편하면서도 어색한 퇴원길.

어머니와 함께 경북대학교 병원으로 향했다. 형수님과 사장어른을 만났다. 간단히 인사를 드리고 형수님의 캐리어와 짐을 트렁크에 실었다. 안전벨트 다 메셨나요?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나는 엑셀을 호기롭게 밟았다. 호기롭게 출발을 했지만 곧이어 어머니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어머니 잔소리를 30년 가까이 들으며 능구렁이처럼 대답하며 어물쩍 넘어가는 화법만 늘었다.

대답은 능구렁이처럼 했지만 운전은 최대한 부드럽게 하려고 나름의 노력을 다했다. 차에는 형수님과 사장어른, 어머니뿐만 아니라 곧 태어날 나의 조카도 함께 타고 있었다.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조카는 세상 밖으로 일찍 나오려고 했지만, 몇 번의 조산 방지 치료를 통해 형수님은 뱃속에 조카를 품은 채로 퇴원을 할 수 있었다. 밖에서 본 우리 자동차 내부에는 네 명이 타고 있지만 실제로는 5명이 타고 있다. 다이소에서 “BABY IN THE CAR” 스티커라도 사서 붙였어야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석 연휴에 딱 맞춘 조카의 조산 이슈는 우리 가족의 최대 화제였다. 모든 가족들이 걱정을 했다. 최근 의사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대학 병원에 입원할 수 있는 병동에 제한이 있었지만, 천만다행으로 형수님은 동네 모 여성의학과의 도움으로 경대병원에서 입원 치료도 받을 수 있었다. 결국 ‘효녀 엔딩’으로 에피소드가 마무리 되었다. 추석 연휴에 딱 맞춰서 아빠, 엄마를 할머니 댁으로 보내지 않도록 한 이름 없는 효녀. 그래서 올해 추석은 내가 종갓집 장남 역할을 다했더라지.

그렇다고 조카를, 아니 형과 형수님 마저도 미워할 것이라는 얄팍한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형의 가족이 우리 집안의 규율을 재정립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나는 최대한 그들을 존중하고 있다. 우리 조카가 우리 집안의 새로운 희망이 될 수도 있겠다. 순간 영화 <스타워즈>의 주인공 아나킨 스카이워커(훗날 다스베이더가 되긴 하지만)를 바라보는 콰이곤 진의 마음을 헤아렸다. 이 아이가 세상을 바꿀 것이야!

​우리 집안은 보수적이다. 종갓집이라는 명분이 실리를 덮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가문을 대표하여 제사를 지내고, 추석 때만 되면 약 30기의 산소를 방문하여 벌초를 하고 성묘를 지낸다. 어머니의 개혁 정신으로 제사의 많은 부분이 약식으로 변경되었지만, 여전히 정정하신 할머니의 기세를 꺾을 수가 없다. 내가 살아 있는 한은 조상님을 모셔야 한다! 할머니 삶의 모토는 효의 실천이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매년 명절마다 일면식도 없는 조상님들을 지극히 모신다.

​할머니 집권 전성기에 형은 엄청난 부담을 갖고 태어났다. 이름부터 원준이다. 으뜸 원(元)자를 쓴다. 그는 종갓집의 장남이 되어 대대손손 가문을 이을 남자였다. 그러나 형은 항상 진취적이었다. 나는 제사가 싫어요. 형은 늘 당당하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결혼하고 자리를 잡으면 집안 문화를 하나씩 바꿀 거다. 나는 형에게 동조했다. 나랑 같이 바꾸자.

​그러나 아직 우리 형제는 집안의 오래된 문화를 혁파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먼저 시간적/금전적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고, 곧 90세에 도달하심에도 동네에서 가장 정정하신 할머니를 설득하기 힘들었다. 이제 슬슬 앞의 문제에 직접 부딪쳐 가족들과 신랄한 토론이 오가야 할 타이밍인데, 형수님은 조카를 임신하게 되었고 우리 형제가 가진 돈과 시간이 한참 부족했다. 형과 형수님은 조카의 센스(?)로 일단 올해 추석 연휴를 갈등 없이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조카가 태어날 뻔한 위기가 있어서 그쪽으로 스트레스를 받았겠지만.

​조카가 무탈하게 성장한다면, 우리 형제가 진짜 집안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참고로 우리 조카는 여자아이다. 나와 미래의 아내가 아들을 낳지 않는 이상 조카는 우리 집의 대를 이을 수 없었다. 그건 웃어른들이 그렇게 정했다. 아들이 우리 집안을 물려 받아야 한다고. 오히려 좋아, 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카가 어차피 대를 이을 수 없으니 명분에 사로잡힌 효를 실천해야 할까요? 우리 이제 명분은 내려 놓고 하나둘씩 정리합시다. 이제 가족들끼리 명절 연휴에는 추억을 쌓는 것이 어떨까요? 할머니를 포함한 어른들에게 우리 형제가 관철할 주장의 틀이 잡혔다.

그리고 시대가 변하고 있다. 주변 지인들의 가족들이 제사 문화를 폐하고, 명절 모임 문화를 축소하고 있다고 들었다. 형 부부도 이들처럼 맞벌이를 하며 육아에 집중하기로 하며 어머니가 육아를 도와주시기로 하셨다. 우리 가족도 집안의 명분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보다 조카의 성장과 후손들의 행복에 우선순위를 두는 방식으로 가족 문화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이제 할머니의 결심만 남았다. 할머니가 증손주를 보시고 시대의 변화를 몸소 느끼실 수 있을까? 아직 불확실하다.

​그래서 형수님을 모신 차를 조심히 운전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조카는 사랑하는 존재를 넘어 집안의 새로운 희망을 상징하는 생명체였기 때문이다. 문득 조카를 핑계거리로 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너무 계산적으로 그 작디작은 생명체를 대하고 있는 건가? 내가 너무 영악한 놈인가?

​그럼 뭐 어때. 형수님과 사장어른이 댁에 돌아가시면서 내 운전실력을 칭찬해주셨다. 어머니도 다행히 운전을 잘해줬다고 말씀하셨다. 형수님과 사장어른이 차 한잔을 권하셨지만 어머니와 나는 두 분께서 편히 쉬시라고 거절하고 집을 나섰다. 분명히 조카도 만족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됐다. 나는 나의 소중한 희망을 안전하게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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