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모교 캠퍼스에 방문했다. 대학시절 힙합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와 만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엔 여전히 대학에 다니며 힙합 음악을 하는 친구들이 있다. 학업과 음악을 병행하다보니 그들의 졸업 시기는 늦어졌다. 남들 눈에는 ‘힙합이나’ 하고 다니는 대학생들로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항상 그들을 응원하고 있다. 두 가지 삶을 살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 그것도 힙합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추구하고 있으니까.
내 10대는 남들이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고 하라는 것만 하는 시기였다. “모범적으로 살아라.”는 우리 부모님이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이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면 여자친구 얼굴이 바뀐다.”는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이다. 그 말에 현혹되어 소위 범생이로 살았다. 두발 규정으로 혼나고 싶지 않아서 머리를 빡빡 깎았고, 주변 친구들이 몰래하던 술과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고 공부만 했다. 그게 올바르게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건강에 크게 문제가 생겼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는데, 공부만 하다보니 당연히 탈이 날 수밖에 없었다. 신기하게도 수능이 끝난 이후로 몸 상태가 차츰 돌아왔다. 그때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남이 시키는 것만 할 수 없는 사람이구나. 그렇다면 대학교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한 번 해보자.
그렇게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막상 대학생활에 적응을 못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매일 내가 어떻게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했다. 하지만 또래 친구들은 달랐다. 그들은 1학년 때부터 취업을 준비했다. 자격증 시험, 유학준비, 대외활동, 학술대회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심지어 알바, 연애, 동아리, 해외여행까지 내 눈에 비친 그들은 전혀 쉬지 않고 달리는 다람쥐 같았다. 나는 아직 좋아하는 것도 못 찾았는데, 친구들은 벌써 좋아하는 것들을 찾은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그들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남들이 지정해 놓은 대학생활의 정석이 있다면 그것을 따라가는 것처럼. 나는 그들을 지켜보며 점점 소외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일찍이 찾았든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든, 나는 그들과 섞일 수 없는 존재였다. 나는 좋아하는 것을 찾고 싶었고,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그래서 방황이 시작되었고, 방황은 불안과 우울을 낳았다.
도대체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무작정 들린 교보문고에서 다이어리를 샀다. 집에 돌아와서 빈 다이어리에 간단히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를 며칠 동안 쓰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키워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영화, 게임, 패션, 음악 그리고 개중에 힙합이 있었다. 내가 힙합을 진정으로 좋아하고 있다고 처음 느끼는 순간이었다. 내가 가장 힘이 들 때 힙합은 항상 내 옆에 있었다.
나는 방황을 하면서 주변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도, 질투하기도 했다. 매일 밤 술을 마셨고, 강의에 매번 지각을 했고, 공부를 하지 않아 성적은 난장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꼬질꼬질한 줄 이어폰에서는 힙합 음악이 항상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래퍼들의 솔직함(keep it real)에 빠져서 매일 힙합을 들었던 것 같다. 나는 본래 솔직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면서도 좋아하는 것을 찾는다는 핑계로 방황하고 있었다.
결국 좋아하는 것을 찾았다. 힙합과 관련된 것을 해보자. 2학년이 되자마자 바로 힙합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나는 처음으로 랩을 배웠고, 힙합 문화를 배웠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동아리방에 가서 친구들과 음악을 만들었고, 래퍼들의 뮤직비디오를 감상했다. 내가 좋아하는 힙합 앞에서 나는 한없이 솔직한 사람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고, 우울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남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나 자신이 떳떳하게 살 수 있었다.
몇 번의 축제 및 찬조 공연에 참여하면서 3학년 때는 동아리 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선배들과 친구들에게 배운 것을 후배들에게 전수했다. 4학년이 되었을 때에는 타 학교에서 힙합 동아리 친구들과 교류를 시작했고 뮤직비디오 제작 크루에 들어갔다. 이때 힙합 뮤직비디오에 빠져서 뮤직비디오 기획자가 되었고, 대학교를 다니며 랩을 하는 “대학생 래퍼”들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비록 지금은 취업 등 각자의 사정으로 크루 활동은 중단했지만 당시는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힙합 씬에는 ‘힙합이 내 삶을 바꿨다’는 유명한 클리셰가 있다. 나도 그러한 삶을 살았다. 유명 래퍼, 프로듀서가 된 것은 아니지만 친구들과 랩 음악을 만들고 힙합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며 쌓았던 경험은 내 삶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게 도와주었다. 오랜만에 동아리방에서 친구들을 만나면서 그간의 추억이 떠올랐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가 내 커리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최근 퇴사를 한 나에게 친구들은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간단히 답했다. “아직 정한 거는 없는데, 힙합으로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