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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Essay

프라모델과 나

Gunn the Seeker 2023. 6. 9. 04:11

초등학생 시절 여름방학이 되면, 항상 자신의 예술품 하나를 창작(創作)해서 선생님께 제출해야 하는 숙제를 해야 했다. 주변 친구들은 이것을 여간 귀찮은 것으로 여겼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창작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유난히 내가 만든 것들 - 이를 테면 소조(塑造), 장난감, 모형 등에 애착이 있었다. 나는 내가 직접 손으로 만든 모든 것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창작 실력이 나쁜 편도 아니라서 내 예술품들은 대부분 학급 대표로 초등학교 학예회 기간에 전시되었다. 학예회 기간에 전시되면 부모님을 포함해, 선생님과 친구들의 칭찬을 받으며 어깨를 한 번 으쓱할 수 있었다. '내가 모두에게 인정을 받았군!' 어린이의 자존감이 높아지는 순간이랄까. 나는 그 순간을 만끽했다. 결국 나는 매년 여름방학이 다가올 때마다 즐거운 고민을 하면서 방학을 준비했다. 이번엔 어떤 것을 만들어볼까? 
그렇게 창작이라는 행위는 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나의 애정이 담긴 물건을 직접 만드는 행위에서 행복을 느낌은 물론이요, 다른 사람의 인정까지 받을 수 있다니! 나의 행복과 자존감도 높일 수 있는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나는 다양한 창작활동을 취미로 꾸준히 해왔다. 창작은 나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종의 업(業)이 된 것이다.
그 중에서 내 삶의 일부가 된 창작 활동이 있다. 그것은 바로 프라모델(Plamodel, 플라스틱 조립모형)을 제작하는 것이다. 프라모델은 합성수지계 플라스틱을 금속주형에 사출 시켜 만든 모형 틀에서 부품을 떼어 낸 이후 직접 조립할 수 있도록 만든 완구이다. 프라모델은 플라스틱(plastic)과 모형을 뜻하는 모델(modle)의 합성어로써, 일본식 영어표현(プラモデル)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조립모형, 플라모델 등으로 사용하는 것을 권고하지만 이미 모델러 업계에서는 프라모델이라는 단어가 굳어져버렸다. 
프라모델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항공기, 함선, 탱크, 자동차 같이 우리가 실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기계를 소형화한 프라모델이다. 두 번째는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와 같은 매체에서 등장하는 가상의 기체(또는 캐릭터)를 실생활에서 조립할 수 있도록 만든 프라모델이다. 대표적으로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에 등장하는 기체(로봇)들을 모형화한 '건프라(건담 + 프라모델)'가 대표적이다.

Source: BANDAI NAMCO Shop - Blog "Tips To Improve Your Gunpla"

나는 프라모델의 여러 종류 중에서 건담 시리즈를 기반으로 한 건프라를 제작하는 것을 소중한 취미 생활로 여기고 있다. 내가 건프라에 빠지게 된 것은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당시 국내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애니메이션 <개구리 중사 케로로(2004)>에서 건프라를 좋아하는 주인공 '케로로'에게 영업을 당한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케로로는 지구를 침공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지구에 잠입한 외계 행성의 군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구의 매력에 푹 빠져서 자신의 임무를 망각한 채, 한 가정집의 가정 주부로 눌러살게 되는 것이 이 애니메이션의 줄거리이다.
케로로는 지구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 중 건담 프라모델을 조립하고 제작하는 것에 빠져버리는데, 그는 이제 건프라를 위한, 건프라에 의한, 건프라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원작 작가가 실제로 건담 시리즈와 건프라의 팬이라 이러한 설정을 부여했는데, 작품 곳곳에서 건담 시리즈의 패러디를 개그 소재로 활용하기도 했다. 심지어 정식 발매되지 않았지만 발매되었으면 하는 건담 프라모델을 작품 속에서 소개하며 실제 발매로 이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제타 건담(PG)를 들고 있는 케로로, 개구리 중사 케로로 126화 중에서.

그래서 <개구리 중사 케로로>를 열심히 시청하던 한 어린이가 나도 건담 프라모델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에 당연했을 것이다. 건프라의 매력이 무엇이길래 케로로가 어쩜 그렇게 좋아할까? 호기심이 생긴 한 소년은 그렇게 건담 프라모델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건프라는 부모님에게 받는 용돈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비용이 많이 드는 취미였다. 조립을 위한 공구를 구매해야 했고, 유지 보수를 위해 케이스를 구매해야 했고, 하나를 구매하면 다른 하나를 추가로 구매해야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비용이 지출되는 구조의 취미 생활이었다. 결국 소년은 건프라를 언젠가 이룰 꿈으로 두고, 그것을 말끔히 포기했다. 
하지만 나는 다른 방도를 찾았다. 꿩 대신 닭이라고, 나는 건담 프라모델 조립을 하는 대신 애니메이션 건담 시리즈를 감상하고 관련 콘텐츠를 경험하는 길을 걸었다. 건담 프라모델도 어차피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기체를 모형화한 것이니 그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지식은 내가 훗날 건프라 제작을 취미로 가졌을 때, 양질의 거름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 나는 건담 애니메이션을 탐닉했다. 그러나 이 탐닉도 중학생 때까지만 가능했다.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대입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건담 시리즈를 다시 탐닉할 수 있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건담 프라모델 제작에 입문하게 된 것은 스물두 살 때이다. 이 때가 되어서야 나는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십 대 시절보다 주머니 사정이 나아졌고, 이제 건담 세계관에 대한 충분한 이해도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무언가를 창작한다는 것에 대한 열의가 다시 불타 올랐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시작되었던 창작 욕구를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자체적으로 억제했는데, 그것이 폭발한 것이다. 이때 나는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직접 건프라를 만들어보자. 어린 시절 내가 가지고 있던 그 창작 욕구를 해소하자. 그리고 이것을 나만의 건전한 취미생활의 한 부분으로 만들자!

RG 샤아전용 자쿠 II.

내가 처음 제작한 건프라는 RG 샤아 전용 자쿠 II였다. 참고로 RG는 건프라의 등급을 의미한다. RG는 1/144의 스케일로 제작되었으며, 상급자를 위한 프라모델이다. 그리고 샤아 전용 자쿠 II는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 (1979)>에서 주인공 샤아 아즈나블이 탑승하는 자쿠 II의 전용 기체이다. 그의 전용기 특유의 색체 - 붉은색으로 도색된 것이 특징이다. 처음 제작하는 건프라로 이 킷(kit)을 고른 이유는 내가 샤아 아즈나블을 가장 좋아하기 때문이고, RG 등급 모델의 크기가 부담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어린 시절 직접 장난감, 모형 등을 창작했던 경험이 녹아 있어서 나는 쉽게 이 킷을 제작할 수 있었다. (상급자용 킷이라는데, 운이 좋게도 어느 정도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온전히 나만의 시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일종의 명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케로로가 건프라에 빠진 이유를 깨달았다. 케로로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건프라에 빠졌던 것이구나. 그는 건프라를 만들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자신만의 페이스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나는 본격적으로 건프라 제작에 빠져들었다.

&lt;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1988)&gt;에 등장한 주역 기체 - 뉴 건담(RG)과 사자비(RG). 2022년에 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건프라 제작 취미가 벌써 6년차에 돌입했다. 그동안 만든 건담 프라모델의 수는 약 15개가 된다. 1년에 두세 개씩 제작한 꼴이다. 프라모델을 꾸준히 조립하면서 나의 실력은 점점 상승했다. 단순히 조립하는 것을 넘어서서, 부분 도색과 마감재를 사용하는 등, 여러 종류의 공구와 재료를 사용하며 나만의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심지어 친구들이 프라모델을 선물로 받으면 내가 대신 제작해 주는 경지에 이르렀다. 내가 초등학생 때처럼 타인에게 창작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프라모델을 제작하면서 나의 행복감과 자존감을 동시에 챙길 수 있었다.
내가 프라모델을 제작하며 온전히 행복함을 느끼는 모습에 여자친구도 신기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평생 프라모델을 취미로 한 사람과 접한 적이 없고, 더더욱 건담 프라모델을 제작하는 사람을 접한 것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심지어 오타쿠 문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녀임에도, 내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혼자서 묵묵히 나만의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었기에 그녀는 내게 작은 선물을 하나 해줬다. 바로 HG 자쿠 II이다. 이것을 예쁘게 만들어 봐, 건준아. 그녀는 내게 작은 주문을 했다.
얼마 전 여자친구에게 선물 받은 HG 자쿠 II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프라모델을 만들면서 여자친구에게 선물 받은 킷이기 때문에 무언가 한 발짝 더 도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웨더링(weathering; 풍화 작용) 작업에 도전했다. 웨더링은 군용 프라모델에서 자주 사용되는 기법인데, 프라모델을 실제 기체가 외부 환경에 의해 기체에 손상을 입은 것처럼 추가 작업을 하는 방식이다. 얼마 전에 여자친구에게 선물을 받은 HG 자쿠 II는 웨더링을 연습하기 좋은 프라모델이기도 하다.

&lt;기동전사 건담 (1979)&gt;에 등장한 "자쿠 II"를 디오라마로 제작했다.

웨더링 작업은 순조롭게 마무리 되었다. 프라모델에 직접 스크래치(상처)를 내고, 에나멜 코팅을 하고, 무광 마감 작업을 했다. 이후 간단하게 디오라마(Diorama; 축소 모형으로 특정 장면을 재현하는 것)를 제작했다. 지점토로 배경을 만들고, 그 위에 완성된 자쿠 II의 자세를 고정시켰다. 자세가 고정된 이후에는 찰흙과 물을 섞은 이후 프라모델에 직접 흙탕물을 칠했다. 사막 지대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자잘한 플라스틱과 스티커를 추가로 부착하고 하고 작업을 마무리했다. 거의 이틀의 시간이 걸렸다. 정말 뿌듯한 작업이었다!
사실 건담과 건프라를 좋아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 매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건덕후(건담과 오타쿠의 합성어)라는 말이 오타쿠 사이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한 자존심을 부리는 건덕후들이 인터넷 커뮤니티나 실제 모임에서 진상을 부리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취미 생활을 공개하는 이유는, 건프라가 나에게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뚜렷한 성취감을, 그리고 타인의 인정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나는 프라모델을 제작할 때마다 창작을 좋아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을 느끼고 있다. 내 마음속 동심은 아직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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