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은 우리 민족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많은 피란민들이 남쪽으로 이주했고, 북쪽에서 온 피란민들이 휴전선 이남으로 정착하면서 북부지방의 음식이 현재 남한으로 전해졌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 평양냉면이다.
평양냉면은 한반도의 평화를 상징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남북한 간의 긴장이 완화되고 평화적인 분위기가 형성될 때면, 남북한 정상들은 평양냉면을 함께 먹으며 평화롭게 식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가장 최근 2018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함께 평양냉면을 먹으며 담소를 나눈 일화가 유명하다.
그러나 평화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평양냉면은 독특하게도 국내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서 호불호가 가장 극심한 음식으로 간주된다.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이들과 평양냉면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 나뉘어 열띤 토론을 나눈다. 마치 탕수육의 소스를 부어 먹는가(부먹), 찍어 먹는가(찍먹)를 토론하는 것처럼 말이다. 평양냉면의 슴슴한 맛 때문에 누구는 그 맛이 훌륭하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그 슴슴함이 아무 맛을 내지 않아 맛이 형편없다고 말한다.
평양냉면은 동치미 국물과 소, 돼지를 넣고 끓인 육수를 식힌 이후 섞은 동치미 육수가 바탕이 되는 음식이다. 이 동치미 육수가 누군가에겐 밍밍하게 느껴질 때가 있고, 누군가에겐 깊은 감칠맛을 주기도 한다. 그 감각의 차이에서 서로의 감상이 바뀌고, 인터넷에서 열띤 토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평양냉면은 계속해서 회자되는 음식이 된다.
서울 시내에는 4대 평양냉면 맛집이 있다고 전해진다. 장충동의 평양면옥, 을지로의 우래옥, 충무로의 필동면옥, 그리고 마포의 을밀대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는 곳은 장충동의 평양면옥이다. 장충동의 평양면옥은 실제로 높은 검색량과 클릭 수를 보여주며, 실제로 많은 관심이 집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 방문한 곳은 어디냐! 바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DDP) 5번 출구 옆에 위치한 평양면옥(장충본점)이다. 전날에 장원닭한마리에서 뜨거운 만남을 했는데, 오늘은 평양면옥에서 그 열기를 식혀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열기를 식히고 음양의 균형을 되찾을 때다.
https://place.map.kakao.com/13093208
평양면옥
서울 중구 장충단로 207 (장충동1가 13)
place.map.kakao.com
이날은 5월 1일 근로자의 날이었다. 오후 2시 30분 정도에 입구에 들어섰는데, 휴일이라서 그런지 여전히 대기 인원이 있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 다행이지, 좀 더 일찍 왔으면 엄청 오랫동안 기다릴뻔했다.
약 10분 정도 기다리다가 자리가 났다. 냉면은 회전율이 빠르다. 금방금방 식탁이 정리되고 새로운 손님이 앉는다. 나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따뜻한 면수가 스테인리스 컵에 담겨 나왔다. 메밀면을 끓이면서 나온 면수였다. 이것을 먹으며 몸을 따뜻하게 데웠다. 갑자기 차가운 음식을 먹으면 체할 수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이렇게 따뜻한 음식을 함께 먹을 것을 권했다. 이곳에는 선조들의 지혜가 녹아 있다.
기본 상차림은 단출하다. 무 절임(무김치)과 배추김치가 나왔다. 둘 다 맛을 보았는데 간이 세지 않고 슴슴했다. 간이 세지 않기에 빠른 시간 내에 발효된 김치의 쿰쿰한 특유의 향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얼마간 기다리고 있으니 평양냉면이 나왔다. 국물은 투명했고, 회색 메밀면이 시각적 대비를 이루었다. 직원분이 냉면을 자를 거냐고 물어봤다. 동행한 친구와 나는 자르지 않겠다고 말했다. 진정한 메밀면은 미리 가위로 잘라먹지 않아도 충분히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명은 무심한 듯하지만 알차게 들어가 있었다. 삶은 계란 반쪽과, 무 절임, 반건조 된 오이, 그리고 고기가 들어 있었다. 고기 고명은 편육 두 점, 제육 두 점이 올라가 있었다. 이곳의 편육은 소고기로 만들어졌다. (아마 양지살로 추정된다) 제육은 돼지고기 삼겹살을 삶아서 차갑게 식힌 것이다. 제육과 편육이 균형감 있게 올라가 있으니 조화롭기 그지없다.
이제 본격적인 식사를 시작할 차례다. 면을 차가운 육수에 풀어서 한 입 맛보았다. <요리왕 비룡>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는 주인공의 음식을 맛본 이들 주위로 美味(미미: 아름다운 맛)라는 글자가 떠도는 연출을 볼 수 있다. 그 美味가 내 머리 양옆으로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토록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깊은 감칠맛을 내는 음식이 있다던가.
국물을 한 모금 마셔보았다. 은은한 동치미의 향과 고기 육수의 감칠맛이 섞여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는 맵고 짜고 단 음식이 주변에 포진해 있는 현대 한국 요식업계에 전쟁을 선포하는 맛이다. 평양면옥의 평양냉면은 굳건히 자신만의 영역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고기 고명을 맛보았다. 편육은 소고기의 담백한 맛과 거친 식감이 느껴졌다. 제육은 돼지고기 특유의 고소한 맛과 부드러운 식감이 느껴졌다. 고기 한 점과 면 한 입을 함께 맛보면 평양냉면의 맛을 극대화하면서 즐길 수 있다.
다른 채소 고명들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다 하고 있었다. 면이 질릴 때쯤 채소 고명을 하나씩 먹어주면 입안을 상쾌히 씻어낼 수 있다. 오이의 오독오독 거리는 식감과 무 절임의 시원한 맛이 인상적이다. 이것이 부족하면 앞에 놓여 있는 반찬을 먹으면 된다.
그릇에 얼굴을 묻고 냉면을 계속해서 흡입했다. 마지막으로 계란 반쪽까지 먹으니 어느새 내 그릇에는 육수만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참으로 완벽한 식사였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지도 모르고 먹게 된다면 그것이 진정한 미식이다.
아직 내가 평양냉면을 맛보지 않았다면, 한 번 도전하고 싶다면 이곳 평양면옥을 무조건 추천한다. 이곳의 평양면옥은 기본기가 탄탄하며 입문하기 아주 좋은 위치(DDP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나와 같은 경험을 하기를 소망한다.
또한 이곳의 냉면은 자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 넣을 것이다. 자극적인 정보와 자료가 즐비한 현대 사회 속에 알게 모르게 상처받는 우리는, 평양냉면 하나로 우리네 삶의 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러했고, 다른 이들도 그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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