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 11분
We don't move the crowd, we kill 'em
2023년 1월 1일 11시 11분. 새해 처음 숫자 1이 6번 반복되는 시간이 되었다. 디지털시계에 표시된 1과 1이 3번 반복되는 모양은 마치 한 무대에서 두 다리로 꼿꼿이 서 있는 세 명의 래퍼와 같았다. 2010년대 국내 힙합씬을 견인하던 도끼(Dok2), 더콰이엇(the Quiett), 빈지노(Bennzino)가 그들이다. 당시 그들은 힙합 레이블 일리네어 레코즈(1LLIONAIRE RECORDS)로 융화되어 그들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다.
일리네어는 래퍼 도끼와 더콰이엇이 2011년 1월 1에 설립한 국내 힙합 레이블이다. 그들은 힙합 용어로 '죽이는(혹은 멋있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영단어 ill(숫자 1과 발음이 같다)과 '백만장자라'는 뜻의 영단어 millionaire를 결합해 자신들의 레이블을 명명했다. 그들은 당시 미국 남부에서 유행하던 힙합 장르 트랩(Trap)을 머니 스웩(money swag)과 엮어 자신들만의 색깔을 구축했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소위 '돈자랑'하는 랩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일리네어 제3의 멤버 빈지노는 2011년 6월 일리네어에 입단했고, 이후 일리네어 3인 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삼각형이 가장 안정성이 높은 도형이라고 했던가, 그들은 삼위일체의 형태로 완벽한 균형을 이루며 자신들만의 커리어를 쌓았다. 약 10년 간 그들은 누구보다 허슬(Hustle; 힙합에서 말하는 추진력 있게 나아가는 모습 혹은 그런 삶)하면서 일리네어만의 문화를 한국 힙합씬에 섞이게 했다.
1 + ILL + MILLIONAIRE → 1LLIONAIRE
도끼는 화려한 래핑과 엄청난 작업량으로 허슬러(Hustler)의 삶을 몸소 증명했다. 그는 일리네어 활동 당시 정규앨범을 포함해 LP, EP, 믹스테잎 등 8장의 앨범과 수많은 싱글을 꾸준히 발매했다. 도끼는 자신의 랩으로 자수성가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성공과 노력의 가치를 자기 음악의 핵심 주제로 삼았다. 또한 그는 자신을 랩스타(RAP STAR)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쇼미더머니> <무한도전> 등 방송출연에 거리낌이 없었다. 이로써 도끼는 래퍼와 힙합 문화가 대중들에게 더 쉽게 다가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더콰이엇도 도끼만큼 앨범을 꾸준히 발매했는데, 7장의 앨범과 여러 싱글을 발매했다. 더콰이엇도 성공과 자신이 이룬 것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는 도끼와 달리 야망(ambition)이 있는 삶을 강조했고, 후배 아티스트들을 더 중요시하게 여겼다. 결국 그는 일리네어 산하 레이블인 AMIBITON MUSIK을 창단하며 다음 세대 래퍼들을 양성했다. 그는 자신의 리믹스 앨범에 후배 아티스트들을 참여시킨다거나, 반주만 들어있는 인스트루멘탈(Instrumental) 앨범을 발매해 자신의 비트 위에 후배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그렇게 더콰이엇은 야망의 중요성을 전파하고, 국내힙합의 파이를 키우기 위한 노력을 했다.
일리네어에서 빈지노의 역할은 특별했다. 서울대 미대 출신 래퍼라는 그의 독보적인 캐릭터성은 그를 다른 래퍼들과 다른 차별점을 주었고, 일리네어(넓게는 국내힙합 씬)에 신규 팬들 유입을 돋구었다. 빈지노는 비록 도끼와 더콰이엇만큼 많은 앨범을 발매하지는 않았지만, 그도 4장의 앨범(1장은 빈지노가 속한 그룹 재지팩트의 앨범)을 발매하며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참고로 빈지노는 2017년 군입대를 해서 약 2년간의 공백기가 있었다) 또한 빈지노는 자신의 친구들과 아트워크 디자인 스튜디오 아이앱 스튜디오(IAB STUDIO)를 만들어 디자인 사업을 시작했고, 국내 래퍼도 디자인 사업에서 재능을 뽐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일리네어의 래퍼들은 그간 국내 대중음악에서 볼 수 없었던 갱(gang) 문화를 도입했다. 당시 미국 힙합 아티스트들은 범죄 집단인 갱의 본래 의미(gangster)보다, 그보다 확장된 멋진 무리라는 뜻의 gang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최초로 한국에 들여온 것이 일리네어이다. 그들은 일리네어 갱(1llionaire Gang)이라고 하는 - 각자 분야에서 왕성히 활동하면서도, 함께 모이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멋진 무리라는 일리네어만의 의미를 제시했다. 그들은 일리네어를 지지하고 따르는 팬들도 자신들과 함께하는 멋진 무리라고 하며 일리네어 갱으로 간주했다.
또한 그들은 일리네어 타임(11시 11분), 일리네어 데이(11월 11일)처럼 숫자 11을 자신들만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이것은 그들의 음악적 활동가 연결되어 팬들의 충성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도끼, 더콰이엇, 빈지노는 일리네어와 관련된 기념일마다 음원을 발매하고 공연을 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컴필레이션(compilation) 앨범의 제목을 [11:11]으로 지었다. 이를 통해 일리네어의 팬들은 그들의 정체성에 공감할 수 있었고, 일리네어의 팬이었던 사람은 11시 11분이나 11월 11일에 큰 의미를 두게 되었다.
일리네어에 대한 나의 기억은 다소 특별하게 남아 있다. 때는 2012년에서 2014년, 나는 강압적인 고등학교의 교육 체제에 사로잡혀 방황을 하고 있던 청소년이었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학습량은 내가 따라가기에 버거웠고 친구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순위를 나누는 교육 시스템은 항상 내 마음에 불을 지폈다. 마음 같아서는 비행을 저지르며 당시 교육 체제에 반항하고 싶었지만, 막상 또 그럴 용기가 없었던 나는 일리네어의 음악을 들으며 겁쟁이 같은 내 마음을 달랬다.
그들이 음악으로 해주는 위로는 점차 나의 삶을 바꾸기 시작했다. 당시 발매한 그들의 앨범을 들으며 나는 삶의 태도를 정립할 수 있었다. 도끼의 앨범 [HUSTLE REAL HARD]를 들으면서 노력의 가치에 대해 알게 되었고, 더콰이엇의 앨범 [AMBITIQN]을 들으면서 나도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성공에 대한 야망이 생겼다. 그리고 빈지노의 [24:26]을 들으면서는 대학교에 진학하여, 나만의 대학생활을 온전히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일리네어의 음악은 나의 고통스러운 고등학교 생활을 벗어나게 해준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이들처럼 성공을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교육 시스템에 굴복하여 어영부영 남들처럼 사는 것보다는 그 시스템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시스템에 굴복하는 것은 멋이 없으니 차라리 그 위에 올라타자.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일리네어의 음악을 들으며 미친 듯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성적은 공부하는 만큼 올랐고 나는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은 매우 힘들었다. 친구들과의 경쟁은 더욱 심해졌고, 수시와 정시를 동시에 준비해서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수능 전날까지 매일 4시간만 자면서 내 몸을 혹사시켰다. 하지만 가뭄에 단비가 오듯이, 2014년 5월 21일 일리네어의 멤버 3명이 공동으로 제작한 컴필레이션(compilation) 앨범이 [11:11]이 발매되었다. 공부를 하다가 무너질 때마다 나는 이것을 청취하면서 성공에 대한 동기를 되새겼고, 가장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나는 성공을 했고, 이 일을 하며 만난 동료들과 더 큰 성공을 했다’는 [11:11]의 서사는 슬럼프가 올 때마다 나약해진 나의 마음을 다잡기에 충분했다. 친구들을 서로 밟고 올라가야 하는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에 맞서 싸우는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이 앨범을 들으며 나는 무조건 성공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원하는 대학교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더 큰 성공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기도 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안고 공부한 결과, 나는 내가 원하던 서울 소재 4년재 대학교 경영학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일리네어 공부법(?)으로 대학에 진학한 후 나는 자연스레 떳떳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떳떳하다의 의미는 매사에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상황을 헤쳐나가는 것을 말한다. 나는 고등학교 교육 시스템에 굴복하지 않고 우직하게 노력하다보니, 어느샌가 그 시스템 위에 올라타 있었다. 시스템이란 골리앗을 이긴 다윗. 그것이 나만의 정체성을 만들어주었고 나는 마주하는 모든 일에 떳떳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떳떳함은 궁극적으로 내가 항상 성공을 꿈꾸고 매일을 노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내가 올해 1월 1일 11시 11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한 명의 일리네어 갱으로써 그들의 음악을 듣고, 공연을 즐기면서 그들이 내게 남긴 것을 되돌아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리네어는 단순히 부자가 된다는 의미의 성공을 강조하지 않았다. 허슬(hustle)을 통해 현실이 된 자신만의 꿈을 성공의 의미로 주창했다. 이러한 그들의 음악과 정체성은 여전히 나의 마음 한 켠에 남아 인생의 추진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시작은 디지털 시계에 표시된 11시 11분이었는데, 어느새 그들의 앨범 [11:11]에 수록된 11곡을 진득하게 다 듣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마지막 11번째 곡 ‘1llionaire Gang 2’의 재생이 끝났고,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최근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일이 많아 개인적으로 힘들었는데 내가 너무 쉽게 무너진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이윽고 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밀어내고 다시 내 삶을 열심히 살기로 다짐했다. 나도 일리네어의 3인처럼 성공할 수 있다고, 그리고 꾸준히 노력해서 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꾸준히 노력한다면 나는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들이 내게 남긴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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