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주의(虛無主義)는 쉽게 우리 인생에 찾아온다. 이름도 어찌된 게 '허무'주의인지, 가끔 보면 허무하게도 찾아오는 것이 허무주의이다. 인생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 인생의 의미가 없다고 느껴질 때, 그것들은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슬쩍 고개를 든다. 최근에 허무주의가 나에게도 찾아왔다. 그 녀석은 나의 과거를 들추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인생은 의미가 없는 거라니까?! 어때, 허무하지?"
이 자식 나를 간파했구나. 허무주의는 내 주변으로 어두컴컴한 그림자를 점점 드리웠다. 내가 서 있는 바닥에 그림자는 점점 외연으로 확장하더니, 어느새 나도 그것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내 몸은 점점 시커멓게 변했고, 마치 숯처럼 나는 굳어버렸다.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것들이 많았는데, 생각처럼 잘 되지는 않았다. 취업을 위해 회사 여러 곳에 지원을 했는데, 한 군데도 연락 한 번이 없다. 블로그도 처음으로 도전했는데,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유튜브도 다시 시작했는데, 다음 콘텐츠 제작 시기가 자꾸 미뤄졌다. 인생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결론에 당도했다.
나는 이 상황을 타개하고 싶었다. 빨리 새까맣게 타버린 몸의 색을 되찾고, 그림자 위에 새로운 빛이 떠오르게 하리라. 이렇게 다짐하면서 나는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고 허황되게 시간을 보낸다면, 현실은 바꾸뀌지 않을 것이고 나를 감싼 허무주의는 더욱 견고하게 나를 옥죌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가지 해결책을 순서대로 진행하기로 결심했다. 첫째는 몸을 극도로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몸의 피로는 숙면으로 이어지고, 숙면은 새로운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나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나의 감각을 깨워줄 매체가 필요했다. 이왕이면 영화와 같이 모든 감각을 사용하는 매체가 좋을 것이다. 이것을 온전히 감상하면서 나의 감각을 깨운다면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해결책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 '등산'을 생각했다. 원래 주 5일 이상 헬스장을 방문해서 운동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단순히 건강 관리를 위해서 하는 운동이었기에, 나는 극한의 신체 자극이 필요했다. 인터넷을 통해 서울에 있는 여러 산들에 대해 검색해본 결과, 북한산에 있는 백운대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곳을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우이신설선 경전철을 타고 북한산우이역에 내렸다. 우이역에서 하차 이후 백운대 등산로 입구까지 약 3km를 1시간 동안 걸었다. 그리고 도착한 백운대 등산로. 그곳에서 나의 등산이 시작되었다. 혼자 등산을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혼자 여행을 다니며 가끔 등산을 한 경험이 있어서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약 2시간 정도 지난 이후, 나는 백운대 정상 근처 바위에 도착했다. 그곳을 올라가려고 하는데, 나는 도중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신발이 문제였다. 산 속 그늘 진 등산로에는 아직 진흙이 있었는데, 그 진흙이 묻은 나의 신발이 암벽등반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등산화가 없어서 농구화를 신었는데, 농구 코트를 달릴 수 있도록 설계된 농구화 바닥에 진흙이 묻으니 암벽위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아, 그 신발로는 무리일텐데."
어떤 등산객 한 분이 나에게 말씀해주셨다. 이거 신고 올라가는 건 힘들 것이고, 무엇보다도 위험하다고. 나의 뒤에 등산객이 많았고, 내가 혹시나 미끄러지면 다른 분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일단 나는 등반을 멈추고, 정상 바위 밑에 공터처럼 형성이 된 공간으로 몸을 옮겼다. 다른 분들이 올라가는 것을 보며 다시 도전할 마을을 다잡고 있었는데, 바람이 갑자기 세차게 불며 나는 약간 겁에 질렸다. 나는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는데 하필 바람이 불면서 그것이 심해진 것이다.
미끄러운 신발과 세차게 부는 바람, 그리고 고소공포증. 나는 그래서 정상을 포기하고 하산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정상을 정복할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상 정복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나는 아쉬운 마음에 반대편 등산로로 하산했다. 백운대 기본 등산 코스는 보통 난이도인데, 반대편 등산 코스는 난이도가 어려움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것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고 했던 것이다.
등산을 하고 내려오니 3시간이 지나 있었다. 기본 코스보다 돌아온 탓이다. 비록 정상에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산행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떠올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확실히 좋았던 것은 생각 정리가 자연스럽게 되었다는 것이다. 산속에서 새들이 우는 소리, 낙엽이 밟히는 소리, 바람이 만들어내는 나뭇잎 소리, 내 숨소리 등 여러 소리가 결합되면서 생각하기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주었고 나는 그 소리에 둘러싸여 평안히 명상을 취할 수 있었다. 일종의 '걷기 명상'을 통해서 나는 불안한 생각을 정리했고, 인생의 허무주의에 맞서 싸울 몸을 다시 만들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거짓말처럼 나의 몸이 하얗게 빛이 나고 있었다. 한 덩이의 숯처럼 새까맣게 타버린 나의 몸이 깨끗해져 있었다. 허무주의가 나를 덮친 것을 씻어낸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나의 바닥에 있던 검은 그림자. 이것들을 어떻게 해치울까 하면서, 나는 최근 알게 된 한 영화를 떠올렸다. 이것이 바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다.
어딘가에서 이 영화가 '허무하고 지루한 일상에 활력소가 된다'는 관람평을 보았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호기심이 작동했다. 그래서 나는 등산을 한 다음 날, 영화 티켓을 예매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혼자서 영화관에 앉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감상했다.
영화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심지어 이 작품이 나의 인생 영화를 갱신했다. 영화의 소재는 최근 할리우드에서 인기 있는 멀티버스(다중우주)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주제는 '허무주의'와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이고, 그것에 승리하기 위한 무기는 '다정함' 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영화에 대한 자세한 리뷰는 생략할 것이다)
허무주의의 끝은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허무주의를 극심하게 경험한 사람들은 자살에 이르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는 허무주의에 빠진 딸(조이)와의 관계를 극복하고, 그녀가 허무주의에서 빠져나오게 돕는 한 어머니(에블린)의 삶을 조명한다. 여기서 남편(웨이먼드)가 행하는 타인을 위한 '선한 행동'들이 에블린에게 영감이 되어 그녀는 딸을 허무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종극에는 자신을 구원하기에 이른다.
이 영화를 보면서 공감을 하는 부분이 많아서 영화를 보는 내내 행복했다. 나는 이타적 행위, 친절함으로 시작되는 이타주의에 대해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타주의는 우리가 잃어버린 관계성을 회복하게 만들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성은 외로운 인간을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만들며, 이윽고 의미가 없던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타적인 행위, 즉 이타주의는 허무주의를 굴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된다.
그렇게 나는 그동안 허무주의가 드리운 그림자에 가려진 이타주의라는 무기에 대해 다시 한 번 인지할 수 있었다. 허무하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내 머릿속에서 지우고, 이타적인 행위가 유발하는 긍정적인 효과들을 내 머릿속에 차곡차곡 다시 쌓았다.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할수록, 나를 다시 삼킬 수도 있었던 내 주변의 그림자도 없앨 수 있었다.
우리는 타인을 신뢰하지 않게 되면서, 또한 내 인생을 왜 이렇게 풀리지 않을까 하며 나만 불행하다고 여기면서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래, 인생은 의미가 없는 거야.' 이런 마음이 우리를 좀먹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쉽게 극복할 수 있다. 신체를 단련하고, 감각을 일깨우며 '이타주의'에 대해 깨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의 인생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허무주의가 갑자기 찾아온다면, 이렇게 대응하자. 나에게는 이타주의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