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삶
나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예술가를 동경한다. 특히 고정적인 수입이 없어서, 또는 주변의 만류에 의해서 다른 부업과 창작 활동을 병행하는 이들을 볼 때면 동경이 존경으로 바뀐다. 대표적인 예가 유대계 체코인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이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사 일을 병행하면서도 끝까지 작가의 꿈을 놓지 않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Herman Kafka)는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는 자신과 달리 연약하고 감성적이었던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아들이 법대에 진학해서 엘리트가 되기를 희망했고, 프라하에서 체코어가 아닌 독일어를 사용하는 엘리트 학교에 진학시킬 정도로 진심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작가가 되길 희망했고, 아버지는 아들의 꿈을 짓밟으며 매우 강압적으로 아들을 교육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카는 현실에 굴복해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나름대로 작가가 되기 위한 방법을 찾았다. 다른 전업 작가들과 달리 두 가지 삶을 사는 것이었다. 하루의 절반은 회사에서 일을 하고 나머지 절반은 집에서 글을 쓰며, 자신만의 집필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현실에 굴복해 꿈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현실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상황을 헤쳐 나갔다.
법대를 졸업한 그는 보험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보험회사에서 몇 번의 승진을 거듭하며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열심히 일을 했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에 따르면, 카프카가 산업용 안전 헬멧을 개발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12년 미국 안전협회로부터 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카프카는 주변 친구들에게 회사 연례 보고서 사본을 보여주는 등 자기 업무에 자부심이 있었다.
퇴근 후 카프카는 계속해서 글을 썼고, 「변신」과 같은 몇몇의 단편소설을 출간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인간관계, 그리고 20세기 초 폭압적인 유럽사회에 대해 고찰하는 작품을 집필했다. 그의 문체는 건조했지만 작품은 초현실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었고 은유적인 사회 비판이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카는 자기 작품에 대한 자부심은 없었는지 앞서 말한 몇 편의 단편소설을 제외하고 다른 소설 작품은 일절 출간하지 않았다.
그는 폐결핵으로 4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는데, 이때가 되어서야 꿈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죽기 전 유언으로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태워 버리라고 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Max Brod)는 그의 유언을 듣지 않았다. 카프카 사후에 브로트는 카프카의 장편소설 『성』 등을 미완성된 상태로 출판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친구의 유언을 무시한 브로트의 행위가 프란츠 카프카를 세계적인 문학가의 반열에 올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카프카의 작품이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심층적으로 분석되었고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된다. 우리 주변에는 너무 쉽게 꿈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문제, 주변 사람들의 만류 등 현실의 벽은 높고 완강해 우리를 현실에 굴복하게 만든다. 또한 한국사회에서 한 개인이 현실에 굴복하여 꿈을 포기하는 것은 패배자로 낙인찍히기 쉬우며, 패배를 했다는 죄책감은 우리를 평생 회하게 만든다.
하지만 때때로 카프카를 떠올리며 현실에 굴복하지 않으면서도 꿈을 좇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만약 카프카가 아버지의 반대라는 현실에 부딪혀 굴복하고 꿈을 포기했다면, 그는 세계적인 대문호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았고 현실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꿈을 지켰다.
현실에 적응하는 것은 일종의 타협이며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굴복과 달리 적응은 패배가 아닌 것이다. 적응은 우리 방식대로 현실에 맞서는 힘이며, 어쩌면 끝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카프카의 삶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도 카프카처럼 살아갈 수 있다.